부군의 함자는 “우”이며, 상주 단밀현에 사셨다. 고려 때 벼슬하여 관직이 봉상대부 사헌부 장령 전라도 안렴사까지 이르셨다[고려때 고사를 보면 왕의 측근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산천에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이름을 제고사(祭告使)라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수령의 어짊과 그렇지 못함, 풍속이 아름다운지 완악한지를 살피며 조세 부담을 살피고 제도를 고르게 하며 널리 묻고 들어 형벌과 상을 실시하며임금의 질문에 응답하도록 하였으니 이를 두고 안렴사라 하였다. 이는 두 가지 직책을 겸한 것이라 존귀함이비할 바 없었다.].
부군은 혼탁한 세상에 청렴결백함을 스스로 지키며 살았다. 아버님 판도판서공이돌아가시자 부군은 여묘살이를 3년간 하였다. 조석으로 호곡하니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서 솟아났는데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하여 일어난 일이라 하였다. 그 일이 알려져정려받았으며 동리 이름을 효자리라 하게 되었다.[효자리라고 새긴 돌이 단밀현 길가 왼편에 있다. 나라 역사와 『여지승람』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府君娶韓山君柳益貞女生二子 長光富 中顯大夫 內府令 次光貴 知鳳州事
부군취한산군유익정녀생이자 장광부 중현대부 내부령 차광귀 지봉주사
부군은 한산군 유익정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맏이는 광부, 중현대부 내부령을 지냈고, 둘째는 광귀, 봉주지사를 지냈다.
墓在丹密縣蛇浦 兌向之原 鄕人立祠宇于涑水 奉安以祠[元至正四年 護軍官敎藏在申禮安㙧家]
묘재단밀현사포 태향지원 향인립사우우속수 봉안이사[원지정사년호군관교장재신예안류가]
묘소는 단밀현 사포의 태향 언덕에 있다. 동리 사람들이 사우를 속수부근에 짓고 받들어 제사지냈다.[원 지정 4년이다. 호군관 교지는 예안 신류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 按廉使墓表 안렴사묘표
尙之轄丹密縣傍有小石碑立路左 刻曰孝子里 故老傳以爲按廉使申公所居也 過者敬之
상지할단밀현방유소석비립로좌 각왈효자리 고로전이위안렴사신공소거야 과자경지
경상도 상주 관할의 단밀현 부근에 작은 석비가 길가에 서 있는데 새겨져 있기를 “효자리”라 한다. 나이든 노인들이 전하기를, 안렴사 신공이 거처하던 곳이라 하는데지나가는 이들이 경배한다.
살펴보건대 공의 함자는 우였으며, 고려때 벼슬하여 관이 장령에까지 이르렀는데일찍이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적 있다. 고려 때 고사를 보면 때로 왕의 측근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파견하여산천에 제사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조사하도록 하고 수령들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따져 올리거나 축출하거나 하도록 하였는데 그 명칭을 안렴사라 하였으니아주 한 때의 명망가를 선발하는 것이다.[아주 한 때에만 있던 일이다.]
공은 어둡과 탁한 세상에서 능히 깨끗하고 결백하게 자신을 지켰으며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 판도판서 윤유께서 돌아가시자 삼년간 여묘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묘소 앞에서 호곡하였다. 두 그루 대나무가 묘소 앞에서 솟아났으니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 하였고 일이 알려지자 정려받았으며 그동리 이름을 효자리라 하게 되었다. 이 일은 역사책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公有二子 曰光富光貴 光富有二子 曰士贇士廉 士廉爲彦陽縣監 其玄孫元錄 又以孝行趾公美旌閭
공유이자 왈광부광귀 광부유이자 왈사윤사렴 사렴위언양현감 기현손원록 우이효행지공미정려
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광부, 광귀였다. 광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으니 사윤과 사렴이다. 사렴은 언양현감을지냈으며 그 현손 원록이 또 효행으로 본받아 그 아름다움이 인정되어 정려받았다.
공의 팔세손으로 지금 시강원 문학인 달도씨는 나와 벗인데 아주 착한 인물이다. 하루는가장을 내게 보여주면서 이르기를, “우리 선조는 돌아가신 지 수백년 지났고 의관이 있는 곳은 거처하는곳에서 동쪽으로 10리쯤 있는 사포의 태향 언덕인데 묘도에 표시된 것이 없고 자손들 역시 먼 곳에 흩어져살아 두루 살피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가면서 드디어 사라져 버리면 나무하는아이들이나 목동들이 혹시 묏등에 올라갈 수도 있으니 비록 구름이 있다 해도 그 장소를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하물며 그 탁월하고 남다른 행동이 또한 장차 민멸되어 전해질 수 없다면 어찌 가엾고 두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족형 승지공이 살아계실 때에 이미 나와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돌을 깎고 부갈을 갖추었으나 미처 세우시지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원컨대 그대에게 글을 얻어 새겨서 선조들의 덕이 후대에 현저히 나타나게한다면 내려주는 것으로 큰 일이 될 것입니다. 감히 배례하면서 청합니다.” 하였다.
余惟按廉公之孝誠 旣已感鬼神而斡 造化赫赫 在人耳目 奚待蕪拙而傳顧
여유안렴공지효성 기이감귀신이알 조화혁혁 재인이목 해대무졸이전고
살펴보건대 안렴공의 효성에 이미 귀신이 감응하여 드러나 조화가 혁혁하고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으니, 어찌 부끄럽기를 기다려 전하고 살피겠는가.
余尙鄕之末學 而於公又外裔也 於義有不得以辭者 遂攷其狀而敍之如右
여상향지말학 이어공우외예야 어의유부득이사자 수고기상이서지여우
나는 아직 동리의 막내 학자일 뿐이지만 공에 대해서는 또한 먼 외손이라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드디어그 정황을 살피고 앞의 내용과 같이 서술하였다.
其立朝歷官次序 及家居行誼 年代已遠而文籍無徵 不得以詳焉
기립조역관차서 급가거행의 연대이원이문적무징 불득이상언
그 조정에 들어간 것이나 어떤 관직을 거쳤는지, 집안에서 어떤 올바른행동을 했는지 시대가 이미 오래 전이고 문적으로 징험할 것도 없어서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지금 조정에 있는 자는 문학공과 그 형 적도 상운도 찰방, 동생 열도예조좌랑이다. 그 소위 족형으로 승지였던 지제가 있었는데 문명이 있고 대과에 합격하여 선비들이 소중히여겼으나 불행히 오래 살지 못하였다. 아들 홍망은 진사이다. 문학군에게는아들 재규가 있다. 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 내가 미처 알지못하여 적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신씨의 기록은 대저 아직 미흡하다.
詩曰 孝子不匱 永錫爾類 又曰 君子萬年 永錫祚胤 非公之謂也耶 嗚呼休哉
시왈 효자부궤 영석이류 우왈 군자만년 영석조윤 비공지위야야 오호휴재
시경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하지 않으니 영원히 그 무리가 있을 것이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자는 오래도록 누리리니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하였으니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아아 감탄스럽다.
생각하옵건대 평소 지킨 깨끗한 마음, 지극한 효심으로 어버이를 지극한정성으로 모셨으니 한결같이 뜻을 키움에서 나온 것이라 살아서는 공경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크게 슬퍼하며 삼년간 여묘살이 하였는데 아침 저녁으로피눈물을 흘리었다. 이에 신명이 비추어 보고 임하였으며 그 지극한 뜻을 느끼게 되어 홀연히 쌍죽이 문득솟아났습니다